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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코넬리 의원 별세 향년 75세

제리 코넬리(민주, VA11지구) 연방하원의원이 21일 오전 오랜 암 투병 끝에 별세헸다. 향년 75세.    코넬리 의원은 식도암 진단을 받은 후 항암치료를 계속 받아왔으나 최근 재발해 2026년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었다. 고인은 14년 동안 버지니아 페어팩스 카운티 수퍼바이저와 5년 동안 수퍼바이저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임했으며 2008년 연방하원의원 선거에 첫 당선된 이후 2024년까지 9선에 성공했다.  지역구는 워싱턴 지역 최대 한인 밀집거주지역인 페어팩스 카운티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어 한인들에게 친숙했다.    코넬리 의원은 스스로 ‘친한파’를 자임했었다. 그는 최근까지 연방하원 정부감시위원회 소수당 최선임 의원으로 활동해왔다. 코넬리 의원은 1980년대 연방상원 국제관계위원회 소속 직원으로 일하며 처음 의회와 인연을 맺었으며, 하원의원 재임 시절 국제관계위원회에 소속되기도 했다.     고인은 연방의원으로 재직하며 은퇴 소방관-경찰관 은퇴 베니핏 확대법안, 연방공무원 원격근로 보장법안,  연방정부 IT 행정 강화법안 등을 주도적으로 통과시켰다. 또한 페어팩스 카운티에는 메트로 실버라인 확장, 옥튼 도서관, 모자이크 디스트릭, 크로스 컨트리 트레일 등에 기여했다. 고인은 1950년 3월30일 보스턴에서 태어나 1979년부터 워싱턴 지역에서 거주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스미티와 딸 케이틀린이 있다.     김옥채 기자 [email protected]코넬리 제리 제리 코넬리 별세 향년 코넬리 의원

2025-05-21

바바라 부시 여사 별세…향년 92세

조지 HW 부시 대통령(1989~1993년)의 부인 바바라 부시(사진) 여사가 폐쇄성 폐질환 등 지병으로 17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이날 부시 가족 대변인 짐 맥그래스는 트위터를 통해 부시 여사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부시 여사는 남편과 아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등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했다. 최근까지 병원에 입원했던 부시 여사는 "가족 곁에 있고 싶다"며 연명 치료를 중단한 뒤 텍사스주 휴스턴 자택에 머물러왔다. 앞서 이틀 전 맥그래스 대변인은 "부시 여사가 가족 및 의료진과 상의한 끝에 추가 의학 치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부시 여사는 만성 폐쇄성 폐질환(COPD)과 울혈성 심부전으로 지난해 여러 차례 치료를 받았었다. 앞서 2009~2010년엔 심장수술과 궤양수술을 받았고, 비교적 최근인 2013년엔 폐렴으로 입원한 적도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지난 1945년 부시 전 대통령과 결혼한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결혼 생활(73년)을 이어온 대통령 부부이기도 하다. 또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자녀를 대통령(조지 W 부시 2001~2009년)으로 배출했다. 그는 소탈하고 꾸밈 없는 모습으로 한때 남편 부시 전 대통령보다 더 많은 인기를 끌기도 했다. 유가족으로 남편 외에 자녀 5명, 손주 17명, 증손주 7명 등을 남겼다. 조진형 기자

2018-04-17

장례식에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틀어달라

은막의 큰 별이 졌다. 16일(한국시간) 92세로 별세한 배우 최은희씨는 1960년대를 전후로 한국 영화 황금기 스크린을 누빈 톱스타였다. 이와 동시에 한반도 분단 상황을 극적으로 체험하며 남과 북 모두에서 영화 활동을 한 드문 배우였다. 특히 78년 신상옥 감독과 차례로 홍콩에서 납치돼 북한에 머물다 8년 만에 탈출한 것을 비롯해 그의 삶은 웬만한 영화보다도 훨씬 더 영화 같았다.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 무대를 누비다 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줄잡아 130여 편의 영화에서 활약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특히 신상옥 감독과 함께한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등의 영화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일찌감치 67년 '공주님의 짝사랑'을 연출, 여배우 출신 국내 첫 감독이기도 했다. 부일영화상·청룡영화상·대종상 등 여러 차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은 한국전쟁 시기 부산 피란 시절로 거슬러 간다. 연극 공연 도중 쓰러진 그를 신 감독이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한 차례 결혼생활에 실패했던 고인과 미혼이었던 신 감독은 54년 결혼, 함께 영화제작소 '신필름'을 운영하고 안양예술학교를 설립하는 등 한국 영화의 눈부신 한 시대를 이끌었다. 76년 이혼한 두 사람은 78년 차례로 납북, 북한에서 해후하며 자연스레 재결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혼 사유는 널리 알려진 대로 신 감독이 배우 오수미씨와의 사이에 자녀가 생기면서다. 두 사람의 납북은 당대의 미스터리 사건이었다. 시작은 '배우 최은희 실종 사건'이다. 78년 초 홍콩을 방문 중이던 고인이 종적 없이 실종됐다. 그해 가을 신상옥 감독까지 사라졌다. 이들이 북한에 있다는 사실은 84년에야 당시 안기부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치'라고 공식 확인됐다. 납치를 지시한 것은 영화광이었던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의 생전 회고에 따르면 북한에 납치되고도 여러 해가 지나서야 신 감독과 만나 서로 북한에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의 이름으로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불가사리' 등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중 고인이 주연한 '소금'은 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86년 영화제 참석 등을 명분으로 유럽으로 향한 길에 오스트리아 빈의 미국 대사관을 통해 탈북에 성공했다. 이후로도 각종 논란을 우려해 10년 넘게 미국에 주로 머물다 99년 한국에 영구 귀국했다. 생전에 고인은 신 감독에 대해 "남편이라기보다 존경하는 예술가로 생각하며 살았다. 부부의 정도 정이지만 영화동지로서의 정이 더 깊었다. 북에서 탈출해 미국 버니지니아에서 3년간 산 게 가정다운 가정을 꾸린 유일한 때"라고 했다. 신 감독을 2006년 먼저 떠나보낸 고인은 4년쯤 전부터 신장 질환 등으로 정기적인 투석을 받으며 투병생활을 해왔다. 척추협착증으로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도 3년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선 꼿꼿하고 단아한 모습을 보여줬다. 고인이 가진 생전 마지막 공식 인터뷰였다. 이 자리에서 고인이 들려준 여배우의 삶은 지금처럼 화려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고인은 "화려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지금까지 변변한 패물 하나 없다. 촬영장마다 짐을 풀고 다시 싸는 '트렁크 인생'이었다. 신 감독과 함께하면서도 개런티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다. 돈 한번 풍족하게 쓴 적도 없다"고 했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로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꼽은 것도 그래서다. 고인은 이 노래를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틀어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고도 했다. 영화감독인 아들 신정균씨는 "어머니는 영화배우이시자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감독의 아내로서, 남편 내조와 연기생활을 병행하시면서 평생 사신 분"이라며 "'아직도 연기할 수 있는데' 말씀하실 만큼 연기 욕심이 많으셨다"고 전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유족으로는 신정균씨 등 2남2녀가 있다. 이후남·나원정 기자

2018-04-16

내 장례식장엔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틀어달라

은막의 큰 별이 졌다. 16일 92세로 별세한 배우 최은희씨는 1960년대를 전후로 한국 영화 황금기 스크린을 누빈 톱스타였다. 이와 동시에 한반도 분단 상황을 극적으로 체험하며 남과 북 모두에서 영화 활동을 한 드문 배우였다. 특히 78년 신상옥 감독과 차례로 홍콩에서 납치돼 북한에 머물다 8년 만에 탈출한 것을 비롯해 그의 삶은 웬만한 영화보다도 훨씬 더 영화 같았다.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 무대를 누비다 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줄잡아 130여 편의 영화에서 활약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특히 신상옥 감독과 함께한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의 영화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일찌감치 67년 '공주님의 짝사랑'을 연출 여배우 출신 국내 첫 감독이기도 했다. 부일영화상.청룡영화상.대종상 등 여러 차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은 한국전쟁 시기 부산 피란 시절로 거슬러 간다. 연극 공연 도중 쓰러진 그를 신 감독이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한 차례 결혼생활에 실패했던 고인과 미혼이었던 신 감독은 54년 결혼 함께 영화제작소 '신필름'을 운영하고 안양예술학교를 설립하는 등 한국 영화의 눈부신 한 시대를 이끌었다. 76년 이혼한 두 사람은 78년 차례로 납북 북한에서 해후하며 자연스레 재결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혼 사유는 널리 알려진 대로 신 감독이 배우 오수미씨와의 사이에 자녀가 생기면서다. 두 사람의 납북은 당대의 미스터리 사건이었다. 시작은 '배우 최은희 실종 사건'이다. 78년 초 홍콩을 방문 중이던 고인이 종적 없이 실종됐다. 그해 가을 신상옥 감독까지 사라졌다. 이들이 북한에 있다는 사실은 84년에야 당시 안기부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치'라고 공식 확인됐다. 납치를 지시한 것은 영화광이었던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의 생전 회고에 따르면 북한에 납치되고도 여러 해가 지나서야 신 감독과 만나 서로 서로 북한에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의 이름으로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불가사리' 등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중 고인이 주연한 '소금'은 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86년 영화제 참석 등을 명분으로 유럽으로 향한 길에 오스트리아 빈의 미국 대사관을 통해 탈북에 성공했다. 이후로도 각종 논란을 우려해 10년 넘게 미국에 주로 머물다 99년 한국에 영구 귀국했다. 생전에 고인은 신 감독에 대해 "남편이라기보다 존경하는 예술가로 생각하며 살았다. 부부의 정도 정이지만 영화동지로서의 정이 더 깊었다. 북에서 탈출해 미국 버니지니아에서 3년간 산 게 가정다운 가정을 꾸린 유일한 때"라고 했다. 신 감독을 2006년 먼저 떠나보낸 고인은 4년쯤 전부터 신장 질환 등으로 정기적인 투석을 받으며 투병생활을 해왔다. 척추협착증으로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도 3년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선 꼿꼿하고 단아한 모습을 보여줬다. 고인이 가진 생전 마지막 공식 인터뷰였다. 이 자리에서 고인이 들려준 여배우의 삶은 지금처럼 화려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고인은 "화려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지금까지 변변한 패물 하나 없다. 촬영장마다 짐을 풀고 다시 싸는 '트렁크 인생'이었다. 신 감독과 함께하면서도 개런티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다. 돈 한번 풍족하게 쓴 적도 없다"고 했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로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꼽은 것도 그래서다. 고인은 이 노래를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틀어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고도 했다. 영화감독인 아들 신정균씨는 "어머니는 영화배우이시자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감독의 아내로서 남편 내조와 연기생활을 병행하시면서 평생 사신 분"이라며 "'아직도 연기할 수 있는데' 말씀 하실 만큼 연기 욕심이 많으셨다"고 전했다. 배우 엄앵란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최은희 선생님 나오는 영화를 구경 갔었다. 한강 모래를 다 뒤집어쓰고 연기하는 걸 보고 '영화배우가 대단한 거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배우가 될 생각을 한 것"이라며 고인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다. 이장호 감독은 고인의 별세에 대해 "한 세기가 끝났다는 것을 절감한다. 한국 영화사에 이만한 큰별은 없었다"며 "남편과 함께 한국 영화 예술성은 물론 산업적 기초 닦은 분 특히 남북 통틀어서 인정받는 유일한 영화인 부부"라고 추모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유족으로는 신정균씨 등 2남2녀가 있다. 이후남·나원정 기자

2018-04-16

'플레이보이' 휴 헤프너 별세…누드+수준 높은 글로 성공

'플레이보이' 제국의 황제 휴 헤프너가 별세했다. 91세. CNN은 28일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를 인용, "헤프너가 자택인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헤프너는 섹스와 불가분의 관계인 건 사실이지만, 전설이라고 평가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그는 토끼 모양의 로고를 창조해 나이키·코카콜라 등 대기업 브랜드에 맞먹는 가치를 창출했고, 새로운 잡지 문화를 열었다. 시장을 꿰뚫은 사업가였고, 시대를 선도한 문화 아이콘이었다. 그는 1926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회계사, 어머니는 교사였다. 네브래스카 출신인 부모는 보수적인 기독교 신자였다.헤프너는 "부모님은 높은 도덕 기준을 가진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스스로를 억제했다"며 "집 안에서도 포옹하거나 키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플레이보이 창간호 발행은 1953년 12월. 표지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마릴린 먼로가 장식했다. 수준 높은 글과 아름다운 여성의 사진을 양 날개 삼은 잡지는 순항했다. 71년엔 LA 대저택에 '플레이보이 맨션'을 마련해 유명인사들과 매일 밤 화려한 파티를 열었다. 잡지 발행 부수가 700만부에 이르던 최고의 황금기였다. 80년대 들어 쇠락이 시작됐다. 펜트하우스·허슬러 같은 성인잡지로 독자들이 빠져나갔다. 21세기는 더욱 혹독했다. 값싸고 자극적인 포르노를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인터넷 시대에 사람들은 플레이보이를 찾지 않았다. 그는 2013년 에스콰이어와의 인터뷰에 "같이 잔 여성은 분명 10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결혼했을 땐 절대 바람을 피지 않았으며, 결혼하지 않았을 때 충분히 여자를 만났다"고 덧붙였다. 2001년 CNN 인터뷰에서 "사회적·성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세상을 바꾼 인물로 기억되고 싶다. 그거면 충분히 행복하다"며 "나는 꿈을 꾸고 꿈을 이루려고 하는 아이"라고 말했다. 그는 생전에 마릴린 먼로 옆에 영면하는 것을 "무척 시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바람대로 미리 마련해둔 먼로 옆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홍주희 기자

2017-09-28

성인잡지 문화 선도한 '성혁명 아이콘' 떠나다

누드 사진, 수준 높은 글로 한때 700만 부 인터넷시대에 잡지 외면 당하자 쇠락의 길로 생전 바람대로 마릴린 먼로 묘지 옆에 안장 '플레이보이' 제국의 황제 휴 헤프너가 별세했다. 향년 91세. CNN 등 미 언론은 28일 플레이보이 엔터프라이즈를 인용, "헤프너가 자택인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그의 아들인 쿠퍼는 "아버지는 미디어와 문화 개척자로서 특별하고 강렬한 삶을 살았다"며 "언론의 자유, 시민의 권리, 성적인 자유를 옹호하는 우리 시대의 중요한 사회문화 운동을 이끌어왔다"고 밝혔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를 성차별 시대의 유물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한다. 자신보다 몇십살 어린 여성들과 천방지축 뛰어놀면서 리얼리티TV쇼에 등장한 말년의 모습이 오해를 부풀린 측면이 있다. 그가 섹스와 불가분의 관계인 건 사실이지만, 헤프너는 전설이라고 평가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그는 토끼 모양의 로고를 창조해 나이키.코카콜라 등 대기업 브랜드에 맞먹는 가치를 창출했고, 새로운 잡지 문화를 열었다. 헤프너는 시장을 꿰뚫은 사업가였고, 시대를 선도한 문화 아이콘이었다. 그는 1926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회계사, 어머니는 교사였다. 네브레스카 출신인 부모는 보수적인 기독교 신자였다. 2011년 헐리우드리포트 인터뷰에서 헤프너는 "부모님은 높은 도덕 기준을 가진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스스로를 억제했다"며 "집 안에서도 포옹하거나 키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군 복무와 대학을 마친 뒤 그는 에스콰이어 잡지에서 일하며 남성 잡지 창간을 기획했다. 중산층 고학력 남성의 욕망을 정확히 반영한 잡지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여성 모델의 누드 사진을 심층 기사와 인터뷰, 유명 작가의 소설과 함께 싣기로 했다. 창간호(사진) 발행은 1953년 12월. 표지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마릴린 먼로가 장식했다. 수준 높은 글과 아름다운 여성의 사진을 양 날개 삼은 잡지는 순항했다. 서구 사회에 몰아친 '성(性) 혁명'과 함께 60~70년대 그의 사업은 전성기를 맞았다. 유명세도 치렀다.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63년 공공외설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것이다. "플레이보이는 라이프스타일 잡지다. 섹스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뿐이다"라고 말했던 그는 재판 결과를 입증이라도 하듯, 콘텐트의 수준을 높이는 데 힘썼다. 존 업다이크.이언 플레밍.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글과 마틴 루터 킹.존 레논.지미 카터 등 저명 인사의 인터뷰가 플레이보이에 실렸다. 브랜드도 확장했다.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등 TV쇼를 진행했고, 토끼 복장을 한 '바니 걸'이 서비스하는 플레이보이 클럽을 전국에 열었다. 71년엔 로스앤젤레스 대저택에 '플레이보이 맨션'을 마련해 유명인사들과 매일 밤 화려한 파티를 열었다. 잡지 발행 부수가 700만부에 이르던 최고의 황금기였다. 80년대 들어 쇠락이 시작됐다. 펜트하우스.허슬러 같은 성인잡지로 독자들이 빠져나갔다. 21세기는 더욱 혹독했다. 값싸고 자극적인 포르노를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인터넷 시대에 사람들은 플레이보이를 찾지 않았다. 위기에 몰린 2015년 플레이보이는 누드 사진을 더 이상 싣지 않겠다는 대변혁을 선언했지만 발행부수는 80만부까지 떨어졌다. 사업은 어려워졌지만 헤프너는 건재했다. 2005년부터 플레이보이 맨션에 동거 중인 여성들과 리얼리티 TV쇼에 출연해 사생활을 공개하는가 하면, 2012년엔 세 번째 결혼을 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2013년 에스콰이어와의 인터뷰에 "같이 잔 여성은 분명 10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결혼했을 땐 절대 바람을 피지 않았으며, 결혼하지 않았을 때 충분히 여자를 만났다"고 덧붙였다. 그는 2001년 CNN 인터뷰에서 "사회적.성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세상을 바꾼 인물로 기억되고 싶다. 그거면 충분히 행복하다"며 "나는 꿈을 꾸고 꿈을 이루려고 하는 아이"라고 말했다. 그는 생전에 마릴린 먼로 옆에 영면하는 것을 "무척 시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바람대로 미리 마련해둔 먼로 옆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홍주희 기자

2017-09-28

알리 이슬람 추도식 엄수…여러 인종 한자리에

지난 3일 타계한 복싱 영웅 무하마드 알리의 이슬람식 추도식이 9일 알리의 고향인 켄터키주 루이빌의 프리덤홀에서 1만4000명의 추모객이 식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엄수됐다. 이슬람식 의식이었지만 자신의 장례식에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다 모이길 원했던 고인의 뜻에 따라 이날 추도식에는 기독교, 유대교 등 여러 종교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추모 연설자 중 한 명인 학자 셔먼 잭슨은 "알리는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멋진 일로 만들었다"며 "알리는 한 인간이 무슬림이면서 동시에 미국인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모두에게 던졌다"고 평했다. 한편, 이날 장례식 입장권은 무료였지만 입장권 배분 직후 온라인 벼룩시장인 크레이그리스트와 이베이 등 각종 사이트에 알리의 장례식 입장권을 유료로 판매한다는 글이 올라와 논란이 됐다. 이에 알리의 유족측 대변인 밥 거넬은 "무하마드 알리의 삶을 조명하는 엄숙한 추모식을 통해 이익을 내려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비통할 뿐"이라며 "온라인에서 입장권을 팔거나 사는 사람들은 사법당국에 신고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오늘(10일) 열리는 장례식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추도사를 하며,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등 세계 정상들도 참석한다.

2016-06-09

그는 "챔피언·시민운동가·전설" 뉴욕 곳곳에서 알리 추모행사

7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복싱 전설 무하마드 알리를 위한 추모 행사가 뉴욕시에서도 열렸다. 〈관계기사 한국판> 시정부는 알리가 사망한 다음날인 4일 '번디니'로 불려진 알리의 코너맨(트레이터)이었던 드루 브라운이 살았던 할렘의 125스트리트와 세인트니콜라스 애비뉴의 한 건물 외벽에 특수 조명 장치를 설치해 시민들과 함께 추모했다. 이 조명 장치는 '무하마드 알리 1942~2016'이라는 메시지와 "불가능이란 없다"는 글귀 등을 선보이며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이 곳을 지나는 시민들은 잠깐 멈추어 사진 촬영을 하고 함께 묵렴을 하며 알리의 사망을 애도했다. 또 이날 브루클린에서는 유명 흑인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가 지난 4월 숨진 가수 프린스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장에서 알리의 추모 행사가 동시에 열렸다. 스파이크 리는 알리의 삽화가 그려진 대형 포스터를 행사장 건물 외벽에 설치해 기념행사 참석자들이 메시지를 남길 수 있도록 했고 시민들은 꽃다발 등을 갖다 놓으면 알리 사망의 슬픔을 나눴다. 빌 드블라지오 뉴욕시장은 성명을 통해 "무하마드 알리는 챔피언이었고 시민운동가였으며 전설이었다"며 "뉴욕시는 링 안과 밖에서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알리의 슬픔을 애도한다"고 밝혔다. 뉴욕의 언론들도 일제히 알리의 특집 기사를 실으며 그의 임종 소식과 함께 그의 삶을 조명했다. 일간 테블로이드 데일리뉴스와 뉴욕포스트는 5일 각각 20페이지짜리 특집 섹션을 제작했고 뉴욕타임스는 4일자 A섹션 1면 톱기사와 스포츠섹션 1면부터 5면까지를 할애해 그의 특집기사를 실었다. 신동찬 기자

2016-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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